제롬 보아텡은 부상을 겪고 있었고 구단에서 있었던 한 시즌 동안 마치 동요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여러 이유로 인해서 보아텡의 장점을 본 적이 없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 인상’의 최신 시리즈에서는 제롬 보아텡과의 첫 심층 인터뷰에 대해서 되돌아 봤습니다. 경기장에서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없었고, 독일에서의 그가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베를린. 1989년 베를린 시민들이 저녁에 동독과 서독을 무너뜨리며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낼 때까지 역사 속에 묻혀 있었고 한때는 벽으로 둘로 양분된 도시였습니다. 젊은 가나인인 프린스 보아텡은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기로 결정내린 장소로 베를린을 정했고 1981년 아프리카를 떠나 중앙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결국 세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얻게 될 새로운 장소로 향했고, 그들 모두는 그들이 선택한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프린스 보아텡은 학업적인 시도를 했지만 좌절되었고 먹을 거리를 찾기 위해 다른 일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 독일 소녀인 캐서린을 만난 후에, 정착할 수 있었고 케빈 보아텡과 조지 보아텡,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프린스는 낮에는 남성 패션 매장에서 일했고 밤에 DJ였으며, 그의 아들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긴장된 상황은 결국 아내와 헤어지게 만들었고 이후 항공 스튜어디스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됐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제롬 보아텡과 아벨리나 보아텡, 두 명의 아이들이 더 생겼습니다.
사실 제롬이 두 살이었을 때 보아텡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가 보아텡과 여동생을 홀로 키웠습니다.
“제가 너무 어려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헤어졌지만, 두 분은 좋은 친구로 남으셨어요. 그래도 어릴 때 제가 아버지를 본 적은 없어요.”
“우리는 베를린의 좋은 지역인 빌머스도르프의 한 아파트에 살았지만 이복형제들은 베딩 지역에 살았어요. 어렸을 때 케빈과 조지를 꽤 자주 봤지만,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좀 이상했어요.”
“커가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롬과 이복 형제들의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고 이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주말에 공원에서 노는 것뿐만 아니라 헤르타 베를린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제롬은 케빈 그리고 조지와 함께 축구하기 위해 혼자 베딩에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항상 축구를 했지만 어머니가 저를 열심히 공부하게 했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축구였었고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저는 항상 연습을 했고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의 경기를 보여주는 독일의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했었죠.”
“TV프로그램은 새벽 1시에 방영되었고 어머니는 제가 그것을 보는 것에 싫증을 내셨어요. 아침에 제가 일어나는 데 지장이 있었거든요. 저는 제가 자란 곳이 좋았어요. 그곳은 편안했고 학창 시절도 즐겼어요.”
“제가 자라면서 스스로 축구를 꽤 잘한다는 것을 알았고, 케빈과 조지도 재능이 있어서 공원에서 꽤 경쟁적인 경기를 했어요!
“세 명이 있으면 재미있었어요. 조지가 최고의 선수였고요. 아카데미 레벨에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해서 훌륭한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10대일 때 어떤 형편없는 선택을 했고, 경기장 밖에서의 일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해서 품고 있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됐어요.”
나머지 두 명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었고, 마침내 중등학교 시절 동안에 가족으로 재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소년은 10대 초반에 축구로 유명해졌습니다.
“우리가 가족으로 함께해서 좋았어요”
“헤르타 베를린은 케빈을 뽑아갔고 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뒤를 따랐어요. 우리 둘 다 잘 지내고 있었고 독일대표팀에 의해 선발되었어요. 하지만 결국 케빈은 탈락했고 나중에 그는 말했어요. ‘그거 알아? 난 가나 국가대표팀에서 뛸 거야.’라고요.”
“저에게는 독일밖에 없었어요. 저는 아버지의 뿌리가 매우 자랑스럽고 제가 반은 가나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저는 자라온 나라에서 뛰고 싶었어요. 그래서 케빈과 저는 서로 다른 나라를 위해 뛰는 특이한 상황에 놓여있었죠. 아버지는 두 나라에서 최고의 선수를 아들로 두고 있어서 매우 자랑스러워 했어요!”
제롬은 10대 중반의 나이에 인생의 갈림길에 다다랐으며 자신의 미래가 놓여져 있는 곳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지만 어느 한 곳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모두를 전부 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대학이냐 축구이냐였어요.”
“저는 어느 쪽이든 집중해야 했고 그래서 저는 어머니께 제가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만약 제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대학에 가서 자격증을 땄을 거예요. 하지만 헤르타 베를린은 저와 계약을 했고, 제 결정은 정당화되었어요.”
실제로 제롬의 발전은 17세에 프로 경력에 데뷔를 할 때까지 헤르타 베를린의 나이별 팀을 거치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8세가 되었을때에 그는 1군팀에서 고정적으로 출전하는 선수가 됐고, 함부르크는 베를린 구단이 받아들인 1백만 파운드의 이적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 집을 떠나야 해서 조금 낯설었지만 함부르크가 좋았어요.”
“아주 흥미로운 도시이고 저는 재빨리 정착했죠. 라파엘 판 더 바르트, 뱅상 콤파니, 니겔 데 용과 같은 선수들이 있었고 저는 곧 편안함을 느꼈어요.”
“마크 휴즈가 감독으로 있을 때 함부르크에서 친근한 분위기에서 맨체스터 시티와 경기를 했었는데 콤파니도 데용도 모두 시티로 떠났기 때문에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요. 두 사람과 가끔 연락했는데 둘 다 정말 행복해 했어요.
“두 사람이 모두 떠나가는 걸 보고 섭섭했어요. 콤파니와 데 용이 이적하는 걸 모두 이해했어요. 둘 다 매우 인기 있는 선수였고 데 용은 그의 스타일 때문에 팬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어요.”
“2009년 UEFA컵 8강전에서 모두 재회할 수 있었어요. 맨체스터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고 저는 그저 ‘우와!’라고 생각했어요.
“놀라운 밤이었고 엘라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지만 우리는 그저 견뎌내기 위해 매달렸어요. 맨체스터 시티가 저에게 접근했었고 그날 밤을 기억해요. 이적에 대해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요.”
“맨체스터 시티는 종종 제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어 구단을 위해 뛰길 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제게 최고의 느낌을 줬었죠. 다른 구단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저는 어렸고 독일에서 영국으로의 이적이 가장 저를 흥분시켰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는 항상 영국에서 뛰고 싶었어요.”
그 다음은?
제롬 보아텡이 단 한 시즌 만에 맨체스터 시티에서 떠나게 된 이유는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과의 불화로 보였습니다.
그는 그 이후로 현재까지 담고 있는 바이에른 뮌헨과 계약했을 했던 시즌에 24경기를 뛰었을 뿐이었지만 이후 분데스리가에서 300번 이상의 출전을 기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