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그리고 Cricket
많은 운동선수들은 자기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재능을 보이고 있으며 몇 몇의 전 시티 선수들은 축구가 아닌 다른 운동에 프로로 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시티의 선수였던 잭 다이슨은 크리켓에 매우 큰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1954년부터 1964년 사이에 랑캐쉐 지역에서 총 4,433점 득점을 기록하였습니다.
다이슨은 시티를 위해 총 72회의 경기에 출장하였고 총 29개의 골을 뽑았습니다.
시티의 No.1 조 하트는 축구선수가 되지 않았으면 크리켓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 할 정도로 크리켓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축구 선수 중 하나입니다.
잉글랜드의 크리켓 국가 대표 조스 버틀러와 조 하트
C 그리고 Sam Cowan
시티의 수비수로 11회의 시즌을 함께한 샘 코완은 총 400회의 경기에서 시티를 대표했습니다.
1933년 FA 컵, 에버튼과의 결승전에서 아쉽게도 승리를 하지 못한 시티의 주장이였던 샘은 당시 국왕이였던 조지 5세에게 다음 해에는 반드시 이기겠다고 말했고 그가 국왕에게 했던 말과 같이, 시티는 다음해에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였습니다.
시티를 떠난 후, 샘은 브라이튼에서 축구 트레이너가 되었고 성공적인 물리치료사가 되었습니다.
1946년 시티는 코완에게 감독직을 부탁하였고 그는 비록 브라이튼에서 맨체스터까지의 먼 거리 출퇴근을 선택함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승락하였습니다.
그는 시티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팀을 디비젼 투 챔피언쉽까지 끌어올렸지만 장거리 출퇴근의 어려움으로 인해 끝내 다시 브라이튼으로의 귀향을 결정하며 시티와의 인연을 마감하였습니다.
C 그리고 Joe Corrgian
메인 로드에서 ‘빅 조’라는 애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코리건은 약 17년간 시티의 선수 생활을 하면서 592회의 경기에 출장하였습니다.
자신감과 경기력에 고군분투를 했던 코리건은 선수 초기 시절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팬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일관성이 부족했던 그의 경기력을 결국 그를 1974년 이적리스트에 올려놓았지만 조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위한 본격적인 노력이 시작되었고 상당한 발전을 이루면서 결국 잉글랜드 국가 대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메인 로드의 시티 팬들은 콜리건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를 1976년, 1978년 그리고 1980년의 ‘올 해의 선수’로 선정하였습니다.
알레스 윌리엄스의 합류와 해외에서의 새로운 도약의 유혹으로 인해 코리건은 1983년 미국의 시애틀 사운더스에 합류하며 시티를 떠나습니다.
C 그리고 Keith Curle
1991년 여름, £2.5 million (당시 수비수로서는 영국 최고의 몸값)의 선수이자 전형적인 센터-백 케이시 컬이 시티에 합류하였습니다.
전 윔블던의 주장이였던 컬은 시티에 합류하자마자 또 다시 주장을 역활을 맡게 되었고 그의 주장 역활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재빠르게 자신의 리더쉽과 수비 능력을 입증해 나갔습니다.
팬들 사이에서 '컬리-울리'라고 불리는 컬은 맨시티의 선수로 성공적인 다섯 시즌을 보낸 후1996년 울버햄튼에 합류하였고 그 후 다시 쉐필드 유나이티드로 이동하였습니다.
현재 컬은 51세의 나이로 칼리슬 유나이티드에서 감독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C 그리고 Gael Clichy
2011년 아스널을 떠나 시티에 합류한 프랑스 출신의 풀-백 가엘 클리쉬는 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승 트로피를 안게 된 행운의 선수 중 하나입니다.
가엘은 10회의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포함해서 시티의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장하였고 2011/12년 로베르토 만치니의 팀은 클럽이 44년간 기다려온 리그 우승 트로피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QPR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의 종료 휫슬이 불림과 동시에 클리쉬와 하트의 기쁨에 찬 포옹은 클럽 역사상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가엘 클리쉬는 2014년 리그 우승, 캐피탈 원 컵 그리고 아스널을 상대로 승리를 이루고 얻은 FA 컵을 들어올린 시티를 위해 2011년에 이어 또 다시 커다란 역활을 하였습니다.
하트와 클리쉬: 11/12 타이틀 획득을 축하하며...
다음 시간에는 알파벳 D에 관련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