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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의 모든 것: K

K 그리고 Kevin Keegan

케빈 키건은 2001년 6월에 메인로드에서 시티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으면서 클럽 감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의 입성은 시티가 프리미어 리그를 강등으로 우울하게 마치고 조 로일 감독이 물러난 이후여서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키건의 첫 각오는 승격하는 것이었고, 활달한 선수 에얄 베르코비치와 함께 무료 이적료로 스튜어트 피어스와 알리 베나르비아를 데려온 이후, 시티는 챔피언스 타이틀을 향해 가면서 108골을 득점했으며, 매주 몰려온 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경기인 왓포드전에서 메인로드는 시티가 재발견한 대담한 공격력으로 경기장의 열기가 높아졌습니다. 한번 보세요...


다른 감독들이 두 명의 조숙한 플레이메이커인 베나르비아와 베르코비치를 함께 뛰는 것을 주저할 수도 있었지만, 키건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시티는 다시 톱 리그로 돌아갔으며, 또한 메인로드에서 마지막 시즌을 경기했습니다. 시티는 9위로 마무리했으며, 또한 UEFA Fair Play로 UEFA컵도 진출했습니다.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에서 첫 2003/04 시즌은 마지막 몇 주까지 강등이 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한 시티에게 어려운 시즌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주목할 만한 경기는 FA 컵 토트넘 원정 경기에서 10명의 시티 선수가 3-0에서 4-3으로 역전한 경기였습니다.

2005년 3월에 키건은 더 이상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벅차다고 느껴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임기는 시티팬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남겼습니다.


K 그리고 케네디, 마크

재능 있는 아일랜드 윙어 마크 케네디는 윔블던에서 £2백만 파운드에 시티로 자신을 증명하러 왔습니다. 그의 리버풀과 윔블던 시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조 로일 감독은 그의 베스트에 케네디가 돌아오기를 바랐고 그는 2000년도에 두 번째 연속적인 승격을 한 시티에서 중요한 멤버였습니다.

케네디는 득점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시티에 큰 공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블랙번전에서 결정적인 승리와 함께 승격에 성공한 계속 뇌리를 스치는 기억 중의 하나는 그가 결정적인 마무리로 득점을 하고 조 로일 감독에게 달려가 환희를 함께 나눈 장면이었습니다. 

멋진 윙어는 프리미어십에서 계속 발전하는데는 실패했는데, 그의 엄연한 재능은 아주 가끔만 비치곤 했습니다. 케네디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시티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티가 디비전 원으로 다시 강등되었을 때, 나란히 그의 이름에도 의문이 붙었습니다. 

2001년에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케네디는 케빈 키건 감독에 의해서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2백만 파운드에 이적되었습니다. 키건 감독은 이 윙어에게 시티는 많은 선수와 경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1군은 제한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시티에서 77경기에 출전했고 11골을 넣은 다음에 이적했습니다.


K 그리고 키팍스 스탠드

1923년 이래로 수천 수만 명의 시티팬의 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옛날 테라스는 팬들이 수십 년 동안 성공을 외치며 시티에게 있어 종종 엑스트라 사람으로 간주되엇습니다.

이 말은 또한 일정 기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선수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꽉 들어찬 키팩스 테라스를 바라보면서 상대팀 윙어는 하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곤 했습니다.

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건립되기까지는 35년이 흐른 뒤였는데, 그때 '파플러 사이드'로 알려진 경기장은 공식적으로 키팍스 스탠드로 이름이 붙어졌습니다.

이 경기장은 32,000명의 시티팬을 수용하다가 1971년 노스 스탠드가 완공될 때는 26, 155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또 한 번의 감축이 있었는데, 경기장이 폐쇄될 때가 가까워서는 옛날 헹뎅그렝한 스탠드에는 오직 18,300명의 시티팬만 서 있었습니다.

실제로 테라스에 얼마나 많이 시티팬들이 서 있었는지 말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수백만으로 추정됩니다. 테일러 리포트라는 정부 지원 조사가 축구 경기장의 스탠딩 구역의 안전을 조사했는데, 모든 테라스는 좌석 구역이 되어야 한다고 권장했고, 키팩스가 테라스 스탠드의 종료를 예고했습니다.

1994년 4월 30일 시티가 첼시와 대결할 때 시티팬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경기장과 고별인사를 했습니다. 팬시 드레스, 깃발, 풍선들로 키팩스를 장식하고 71년간의 역사를 기념했습니다. 마지막 휘슬이 불었을 때는 많은 이가 눈물을 흘렸으며 기념품으로 콘크리트 조각을 떼어가려고 시도했습니다.

며칠 후에 건물 철거팀이 들어서고 키팩스가 한때 자랑스럽게 서 있던 곳에 자갈과 철골조의 사진이 지역 미디어에 게재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지어 3층으로 들어선 새로운 키팩스는 몇 마일에서도 보이는 명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스탠드는 1995-96 시즌에 홈경기 개막식으로 시티팬을 처음으로 맞이했습니다. 처음 2층, 3층에 좌석을 차지한 많은 시티팬이 괴로워했는데, 이는 경기장의 전망이 나빠서가 아니라 멀리 올드 트래퍼드가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키팩스!'라고 에티하드에서 시티팬이 종종 함성을 높이곤 합니다.


K 그리고 킨클라제, 지오

프란시스 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루지야 선수 지오 킨클라제를 £2백만 파운드에 디나모 티빌리시에서 오도록 지휘했습니다. 시티는 1995년 여름에 몇 달 동안 감독이 없었는데, 이 거래는 전 감독 브라이언 호튼이나 협상에 있었던 앨런 볼과 상관없이 성사되었습니다.

21세 미드필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적었지만, 프란시스는 그가 괜찮은 선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볼이 시티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그는 시티팬들이  킨클라제를 '넋을 빼고 바라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맨시티팬은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궁극적으로 볼이 맞았습니다. 킨클라제의 놀라운 드리블과 예리하고 정확한 패스를 보려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습니다. 그는 득점을 만들어 갔고 그가 숨을 멎을 정도의 경기가 두 세 번 정도는 있었습니다.

그가 클럽을 위해 득점한 각 골은 기억에 남을 만한데, 특히 사우샘프턴전에서 독보적인 개인기를 발휘했습니다. 그가 5명을 제치고 찬 골이 당돌하게 데이브 베선트를 지나쳐 골망을 흔든 장면은 맨체스터 시티 선수가 넣은 최고의 골 장면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킨키’는 시티가 강등을 피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리버풀전에서 2-2로 무승부를 하고 경기를 마칠 때는 시티가 디비전 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충분히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을 떠났습니다.

독수리들이 메일로드 위를 맴돌며 먹잇감을 기다리곤 했는데, 킨클라제는 시티의 약간 빗나간 호조에서 좋은 먹잇감이었고, 셀틱, 리버풀, 바르셀로나가 그를 덮치기 위해 £1천만 파운드를 제시했습니다.

시티가 톱 리그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시도했기 때문에 킨클라제는 2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볼과 프랭크 클럭 모두 시티를 되살리는 데 실패했고, 킨클라제의 가치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점이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조 로일이 1997/98 시즌의 마지막 달에 도착했지만, 디비전 투로 강등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로일은 킨클라제의 미래가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고, 시티에서 121경기에 출전해서 22골을 득점한 후에 이 그루지야 선수는 아약스로 이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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