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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CITY DNA | ‘천재 중의 천재’ 피터 도허티

CITY DNA 9번째 코너는 첫 번째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피터 도허티에 관한 것입니다.

#9 CITY DNA: 피터 도허티

 

천재 중의 천재

1937 맨체스터 시티에 디비전1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피터 도허티는 북아일랜드 최고의 선수 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당시 전문가들이 피터 도허티를 수식하는 문구입니다.

  • 전쟁 전후 세대에 나온 잉글랜드 축구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
  • 도허티의 마법과도 같은 재능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의 플레이는 부드러웠고 우아했으며 블랙풀, 허더즈필드, 돈캐스터에서 때에도 팬들은 그의 공격적인 움직임을 즐길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던 기간이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시기였습니다.

 

그의 이야기:

런던데리에서 자란 피터 도허티는 그의 축구 경력을 콜레인과 글렌토란이라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곳에서 아일랜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도움을 주었고 19살의 나이로 1933년에 블랙풀로 이적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의 움직임이 좋았고 우아한 기술과 탁월한 결정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력은 맨체스터 시티에 포착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블랙풀에서 87번의 경기 출에서 29골을 넣었고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을 하게 됐습니다. 블랙풀은 당시 2부리그에 있었고 급하게 자금이 필요하여 1936 2 도허티를 영입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도허티가 이적을 주저하기도 했었습니다.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고 결혼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럽레코드를 기록하며 1 파운드에 이적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8개월만에 도허티는 디비전 1 타이틀을 맨체스터 시티에 안겨주며 이적 자금보다 많은 것을 클럽에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맨체스터 시티에서의 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적 후에 메인로드에서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고 시즌에 멋진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경기에 나서기 전 피터 도허티의 모습

 

프레스턴과의 경기에서 단조로운 경기력을 보인 , 어떤 이들은 조롱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1 파운드라고? 1 파운드 담배 케이스 같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1936/37 이후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시즌 초반에는 도허티가 골을 만들어 내곤 했지만 12경기에서 1승만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싱 데이기간에 메인로드에서 미들스브로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뒀고 이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도허티의 활약에 힘입어, 22경기 무패 행진을 달렸고 선두였던 아스날과 격차를 좁혀 나갔습니다. 그리고 4월에 75,000명의 팬이 운집했던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도허티는 선제골을 넣었고 귀중한 2-0승리를 거둘 있었습니다. 경기 결과로 팀은 선두로 올라서게 되었으며 마지막 4경기에서 3경기를 승리하며 디비전 1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있었습니다. 시즌에 도허티는 30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시즌이 맨체스터에서 보냈던 가장 화려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즌 도허티가 25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등이 되는 불운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2부리그에서의 시즌이 시작된 이후에 130경기에 출전하여 79골을 넣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계2차대전이 발발한 이후 리그 일정이 잠시 중단되었고 도허티는 전쟁에 참전하게 됐습니다.

전쟁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 국가대표로 16번의 경기에 출전하였습니다. 맨체스터 시티 소속 선수로 남아있던 그는 전쟁 기간에 89번의 경기에 나섰으며 60골을 넣기도 했습니다.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초청선수로도 뛰었으며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는 더비 카운티로 이적하여 1946 더비의 FA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감독직으로의 경력을 바꾸기 전까지 도허티는 허더즈필드와 돈캐스터에서 선수 경력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돈캐스터에서 선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북아일랜드 감독으로 11년을 보냈으며, 감독으로 있을 동안에 선수로서 보여주었던 창의적이고 공격적인 플레이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도허티는 끊임없이 경기장을 뛰는 대신에 공을 가지고 연습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발리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북아일랜드 감독시절의 피터 도허티/h2>

 

북아일랜드에서 그가 가졌던 최고의 순간은 1958 월드컵 본선이었습니다. 북아일랜드는 8강까지 올라갔으며 이는 역사상 최고의 순위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또한, 도허티는 리버풀의 스카우터로 활약하였으며 스컨도프에서 뛰던 케빈 키건를 발굴하여 클럽에 도움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도허티는 1990 숨을 거뒀으며 그의 축구 유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잉글랜드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헌액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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