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시티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 중 한 명인 조지 킨클라제에 대해서 조명해 봤습니다.

#조지 킨클라제: 마이다스의 터치 능력을 가진 선수

 

조지아 츠빌리에서 태어난 조지 킨클라제는 클럽의 암흑기에서 빛났었던, 활동량이 좋은 미드필더였습니다. 조지아 국가대표로 웨일스와 경기를 치를 때 최고의 활약을 펼쳤었고, 당시 클럽의 회장이었던 프랜시스 리는 영입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 디나모 츠빌리시에 2백만 파운드를 지불하며 그를 맨체스터 시티에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길이 매우 적었으며 당시 감독이었던 알란 볼은 팬들에게 킨클라제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클럽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그의 플레이를 보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킨클라제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3년을 보냈고 1998년 아약스가 그를 5백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맨체스터 시티를 떠나게 됐습니다.

 

그의 이야기:

1973년 7월 6일에 태어난 조지 킨클라제는 로비존과 마리나 킨클라제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이였습니다. 그 당시 소비에트 연합의 법에 의하면 새로 태어난 아이를 1주일 동안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비존은 살며시 병원에 들어가 3일 만에 아이를 볼 수 있었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다리가 휘었네. 좋은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조지 킨클라제가 홀로 설 수 있게 되자마자 로비존은 아이에게 공을 굴려주었고 2살 된 아이는 왼발로 트래핑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에 아버지 로비존은 놀라워 했으며 이유는 그의 가족 중 왼발잡이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지 킨클라제가 4살이었을 때 인터밀란과 디나모 츠빌리시와의 경기에 그를 데려갔었고 조지가 축구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로비존은 조지에게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15살이 될 때가지 그렇게 지속하였습니다.

또한, 디나모 축구 학교에 입학한 조지는 6살이었고 그의 균형 감각과 다리 움직임을 발전시키고자 댄스 클래스에 가입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성인 무대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고 이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16살 때 므레테비 츠빌리로 이적하여 1군팀 경험을 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경기력은 훌륭했고 1시즌만에 다시 디나모 츠빌리시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첫 시즌에 리그와 컵 우승을 달성하였고 그 이후 19살의 나이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1994년에는 웨일즈를 상대로 멋진 골을 성공시키며 5-0 승리를 가져오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웨일즈 감독이었던 사우스올 감독은 웨일스를 완전히 격침시켰으며 조지 킨클라제는 전혀 다른 클래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웨일즈와의 리턴매치에서 킨클라제는 그 경기의 유일한 골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리 회장은 이미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킨클라제의 모습을 보면서 맨체스터 시티로 영입하기 1년전에 그에게 제안을 했지만 거절을 당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고 이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킨클라제는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첫 골로 1-0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다음 경기였던 미들스브로 경기에서는 그의 능력을 볼 수 있었던 골 장면이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미들스브로 홈경기장에서 열렸던 경기는 4-1로 졌고 그의 맨체스터 시티 경력을 보여주는 단면과 같았습니다.

 


메인로드에서 그의 가장 기억할 만한 경기는 아마도 1996년 2월 열렸던 뉴캐슬과의 3-3 무승부 경기가 될 겁니다. 케빈 키건이 이끌고 있던 뉴캐슬은 우승을 노리는 팀이었고 좋은 출발을 보이며 리그를 순항중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킨클라제는 당시에 최고의 활약을 하고 있던 다비드 지놀라를 무색하게 만드는 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3주 뒤 사우스햄튼 전에서 보여줄 최고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실제로도 사우스햄튼전에서 보여준 플레이는 가장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사우스햄튼 수비진을 제치며 골키퍼와의 일대일 찬스에서 침착하게 칩슛으로 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경기의 하프타임에는 많은 팬들이 그의 골 모습을 다시 보기 위해 TV앞으로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첫 시즌이 종료되고 난 이후에,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맨체스터 시티는 마지막 경기에서 리버풀과 2-2 무승부를 거뒀지만 강등을 막을 수는 없었고  킨클라제는 경기장 위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시즌 개막 후 11경기에서 승점을 2점 밖에 획득하지 못했던 것이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알란 볼 감독은 팀을 잘 다스리지 못했고 핵심 선수들은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프리미어리그 강등으로 인해 치르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킨클라제는 다른 팀으로 이적할 것이라 예상됐지만 팀에 남아 프리미어리그 복귀를 희망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 그를 레전드로 굳건히 생각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마치 빠르게 침몰하는 배와 같았고, 한 시즌만에 프리미어리그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러 실수로 인해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클럽은 5명의 감독을 교체해야만 했고 상대팀에게 킨클라제는 집중 마크 대상으로 찍혀 경기장 위에서 거칠게 다뤄졌습니다. 그리고 46경기에서 19패를 하며 시즌을 14위로 마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 시즌을 마친 후 킨클라제는 매우 힘든 시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떠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바르셀로나와 다른 팀이 저에게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맨체스터 시티가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하는데 돕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는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팬들은 그를 남기를 바랬으며 다시 팀이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맨체스터 시티는 1998년 3부리그로 추락하며 클럽 역사상 가장 낮은 단계리그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98년 2월에 조 로일이 프랭크 클락크 감독을 대신하게 됐지만 그도 팀의 추락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팀의 발전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킨클라제를 다른 클럽에 팔고 프리미어리그 밖에서 좀 더 근면한 선수를 통해 팀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킨클라제는 아약스로 이적하였고 팀 역사속에서 팬들이 가장 사랑했던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조 로일 감독은 킨클라제는 중심으로 팀을 만들 수 없다고 결정했었습니다. 알란 볼과 프랭크 클락크 감독은 킨클라제에게 너무 많은 신뢰를 주고 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사람들은 맨체스터 시티가 이런 화려한 선수를 감당할 수 없다고도 말하였었습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맨체스터 시티에서 활약 했었던 폴 월쉬도 그가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결정하게 된 이유도 킨클라제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알란 볼이 맨체스터 시티에 오자마자, 한, 두 게임 이후 팀이 끔찍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킨클라제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골을 만들 수 없었고 많이 뛰지도 않았습니다. 태클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팀의 그 누구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볼은 킨클라제를 중심으로 팀을 움직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터 비그리와 니키 서머비는 그들이 플레이하지 않은 지역에 묶여 있었습니다.”

“조지는 공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3시즌 동안 2번의 강등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는 저를 속였습니다. 그가 가진 능력을 통해 그가 풀 수 있던 것들보다 그가 만들어 낸 문제가 더 많았습니다.”

킨클라제의 아약스 이적도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킨클라제를 윙어 자리에 한정시켰고 결국 1999년 11월에 더비 카운티로 임대가며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하였습니다. 그 이후 더비로 완전 이적을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완전히 적응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플레이들을 보여주며 2002/03 더비 올해의 선수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아약스에서 축구를 즐기지 못했습니다. 가운데에서 뛰기 보다 윙에서 뛰게 하였고 저는 잘 뛰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좋았던 점은 많은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 저의 경기를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왔었다는 점입니다.”

“떠나기로 결정했고 더비 카운티로 복귀하였습니다. 이곳에서도 괜찮지만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더비 카운티 소속으로 메인로드에 찾아왔고 제가 받은 환대는 훌륭했습니다.”

“저는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뛰고 싶지 않았고 경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클럽과 팬을 사랑합니다.”

그의 플레이는 이제 그의 와인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제조 지역에서 그의 브랜드가 담긴 와인을 만들고 있으며 맨체스터 남부지역에 와인 바를 만들 예정으로 알려졌습니다.

메인로드에서의 그가 보냈던 시간에 재앙과도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만 그가 보여준 환상적인 플레이를 통해 킨클라제는 맨체스터 시티의 훌륭했던 선수들 중 한 명으로 남아있습니다.